크랭크를 진짜 레버로 — Playdate 게임 〈Root Bear〉를 PLC·HMI 아케이드 게임기로 만들었다
발단 — 시초는 Playdate의 〈Root Bear〉
시작은 내가 낸 아이디어가 아니다. Root Bear — 노란 손바닥만 한 콘솔 Playdate용으로 TEAM ROOT가 만든 게임이다. 규칙은 지독하게 단순하다. 크랭크(손잡이)를 돌려 루트비어를 따르고, 정해진 눈금에 맞춰 멈춘다. 곰 손님들이 그 결과를 깐깐하게 평가한다.

원작 〈Root Bear〉의 한 장면. 탭을 열어 잔을 채우고 눈금에 맞춰 멈추면, 옆에 선 곰 손님이 결과를 평가한다. 1비트 흑백 화면에 팁 항아리까지 — 이 한 장이 이번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다. © TEAM ROOT · Playdate 카탈로그 · itch.io
이 게임이 재밌는 이유는 화면이 아니라 손에 있다. 크랭크를 얼마나 여느냐로 유량이 변하고, 언제 닫느냐로 결과가 갈린다. 2023년 Playdate 커뮤니티 어워드에서 사운드 디자인상과 크랭키상을 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업데이트 소식을 본 곳)
한참 들여다보다 생각이 하나 붙었다.
저 크랭크를, 진짜 레버로 바꾸면 어떨까.
화면 속 손잡이 대신 손으로 당기는 실물 레버. 잔이 차오르는 건 터치패널이 그리고, 유량과 판정은 진짜 컨트롤러가 계산한다. 원작이 루트비어라면 이쪽은 맥주로 — 손바닥 콘솔 게임을 아케이드 기계로 옮기는 셈이다.
그래서 만들기로 했다. 그것도 장난감 만들듯이가 아니라 PLC와 HMI로. 마침 손에 다 있었으니까.
Senbrix(래더와 C#을 한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PLC 개발 환경)와 Senvas(AI가 화면을 만들어주는 산업용 HMI). 둘 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제품이다. 평소엔 공장 설비에 들어가는 물건인데, 이번엔 순전히 놀려고 써봤다.
그래서 취미 프로젝트의 원칙을 이렇게 정했다.
게임기지만, 속은 진짜 산업 설비처럼. PLC가 게임 로직을 갖고, HMI는 연출만 한다.
실물 입력은 딱 하나, 포텐셔미터 레버다. 기울인 만큼 콸콸 나온다. 수위·판정·순위표는 전부 PLC 쪽에 살고, 터치패널은 그 값을 읽어 그리기만 한다. 화면과 기록이 어긋날 수 없는 구조 — 판정의 단일 출처가 PLC 하나뿐이니까. (설비 만들던 습관이 취미에도 그대로 나왔다.)
만드는 과정도 제품에 맡겼다
이번 프로젝트의 재미 포인트 하나. 만드는 과정 자체를 제품의 AI 워크플로우로 진행했다. Senbrix도 Senvas도 “인터뷰 → 설계 → 계획 → 구현 → 검증” 단계를 갖고 있고, AI가 에디터에 붙어 단계마다 나한테 확인을 받으며 진행한다.
덕분에 내가 한 일은 대부분 “이렇게 하고 싶은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사양이 저절로 자랐다.
- 토글 스위치 한 판 → 아날로그 레버 (기울인 만큼 유량이 변해야 손맛이 산다)
- 1판 → 10회차 + 총점 + 명예의 전당 (TOP10에 3글자 이니셜 등록)
- 난이도 팝업 (쉬움 / 보통 / 어려움 + 제한시간)
말로 부풀린 사양이 그대로 PLC 로직과 화면 설계로 떨어지고, 하루가 끝날 무렵엔 실제로 돌아가는 게임기가 되어 있었다. 솔직히 이 부분이 제일 놀라웠다.
게임이 되려면 — 규칙 다듬기
몇 번 플레이해보며 규칙을 손봤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던 작업이다.
- 목표선은 25~90% 랜덤 — 낮은 목표가 나와야 “조금만 정확히”라는 기술이 생긴다
- 등급 PERFECT(±1.5%) / GREAT(±4%) / GOOD(±8%) / BAD, 넘치면 즉시 FAIL
- 시간 가산점 — 성공하면 남은 시간에 비례해 최대 +20점.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 제한시간은 화면에서 숨겼다 —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박감이 훨씬 재밌다
화면 — 출렁이는 맥주와 탭 기계
Senvas 쪽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800×480 터치패널에 장면 5종 (타이틀 / 게임 / 결과 / 순위표 / 이니셜)이 한 화면에서 전환된다.

중심은 당연히 맥주컵이다. 처음엔 밋밋한 세로 게이지였는데 “물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하는 욕심에 액체 전용 컨트롤(수위가 출렁이는 애니메이션이 들어 있다)로 바꾸고, 그 위에 안쪽이 투명한 맥주컵을 겹쳤다. 컵 실루엣은 베지어 곡선으로 그린 필스너 스타일 — 첫 버전이 사다리꼴로 각져서 내가 퇴짜를 놨다.

컵 위에는 맥주 탭 기계를 붙였다. 레버를 열면 꼭지 아래로 줄기가 나타나고 (굵기 3단계 = 레버 각도), 닫으면 사라진다. “저기서 나온다”는 인과가 눈에 보이니 조작감이 확 산다.

디테일 하나. 목표 눈금 바와 컵 속 액체는 반드시 같은 세로 구간을 써야 한다. 컵 위에 % 라벨을 얹느라 목표 바가 몇 픽셀 밀렸던 적이 있는데, “선에 맞췄는데 GOOD이 뜨고, 조금 넘기니 PERFECT가 뜬다” 는 제보로 들통났다. 화면의 눈금이 곧 게임의 공정성이다.
하루의 끝
PC에서 잘 돌던 걸 실물 장비에 올리는 마지막 한 걸음은 늘 그렇듯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리눅스 권한이며 화면 세션이며 몇 번 넘어졌지만, 결국 레버를 당기면 맥주가 차오르고 손을 놓으면 판정이 뜨는, 처음 상상했던 그 물건이 됐다.
레버를 놓고 1초 뒤 판정, 2초 결과 표시, 바로 다음 회차. 10회를 채우면 총점과 순위표가 뜨고, 아무도 안 만지면 60초 뒤 조용히 타이틀로 돌아간다.
남은 건 이런 것들이다.
- 레버 반응을 좀 더 빠릿하게
- 순위표에서 내 기록 강조하기
- 그리고 실물 케이스 — 진짜 탭 핸들을 레버에 씌우면 그때가 진짜 완성이다
마무리
취미로 게임기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끝나고 보니 산업 설비 하나를 시운전한 기분이었다. PLC가 로직을 갖고 HMI가 연출을 맡는 구조, 레버 캘리브레이션, 현장(?) 트러블슈팅까지 — 평소 하던 일을 그대로 놀이에 써먹은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우리 제품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방법 같기도 하다. 잘 꾸민 설비 데모 열 개보다, 주말에 맥주 게임기 하나가 뚝딱 만들어지는 쪽이 “이걸로 뭘 할 수 있는지”를 훨씬 잘 말해주니까.
▶️ 2부: 950원짜리 가변저항에 어울리는 레버 깎기, 그리고 프로콘 진동 이식 실패기 — 손잡이도 없던 가변저항에 진짜 볼 레버를 깎아 3D로 뽑고, 진동 햅틱에 도전했다 장렬히 실패한 이야기.

원작 〈Root Bear〉의 타이틀. 노란 손바닥만 한 콘솔 Playdate용 게임 하나가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 TEAM ROOT · Playdate 카탈로그
🍺 원작 〈Root Bear〉는 Playdate 카탈로그에서, 이전 버전은 itch.io에서 만날 수 있다. 크랭크로 따르는 원조의 손맛이 궁금하다면 그쪽이 먼저다. 좋은 게임을 만든 TEAM ROOT — Cole O’Brien · Andrea Cabral · Beau QP · Alex Sussman — 에게 경의를.
글에 실은 원작 화면은 게임 소개 목적의 인용이며, 저작권은 TEAM ROOT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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